⑤ 욕구의 뇌|원하던 삶인데, 왜 하나도 재미없을까?
수현은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자기 삶에는 없었다
수현은 휴가를 냈다. 멀리 떠날 계획은 없었다. 알람을 끄고 늦게 일어나 커피를 내렸으며, 오랫동안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집 안을 천천히 걸었다. 옷장에는 회의와 행사에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산 옷이 가득했다. 책장에는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읽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산 책도 있었다. 달력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참석한 약속이 빼곡했지만 정말 기다려지는 일정은 하나도 없었다.
서랍을 정리하다 서른 살에 적었던 목표 목록을 발견했다. 안정적인 직장,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 좋은 집, 믿을 만한 연인, 전문성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고 적혀 있었다. 대부분 이루었다. 그런데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는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수현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목표를 세웠던 사람과는 오래전에 멀어져 있었다.
인간은 새로운 보상과 환경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승진과 연봉 인상, 새집과 사랑의 설렘은 처음에는 강한 기쁨을 줬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기준으로 바뀌었다.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했다. 수현은 기쁨이 사라질 때마다 목표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 높은 직책과 더 많은 돈, 더 확실한 관계를 얻으면 만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성취가 커질수록 행복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기준만 높아졌다.
매슬로의 다섯 번째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는 성공의 최종 등급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자기다운 방향으로 실현하려는 욕구였다. 타인의 기대 속에서 감춰 온 선택을 회복하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과정이었다.
수현은 노트에 질문을 하나 적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잘하는 일은 많았지만 원하는 일은 알지 못했다. 수현은 회사가 요구하는 답을 찾는 데 익숙했고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에 관한 질문 앞에서는 무력했다.
재미가 없었던 것은 인생이 아니라 선택권이었다
자기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인간의 내적 동기와 심리적 웰빙에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자율성은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는 감각이었다. 유능감은 성장하고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이었으며, 관계성은 다른 사람과 의미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다.
수현은 유능했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위기에서도 결과를 만들었다. 관계도 많았다. 그러나 자율성이 희미했다. 안정적이기 때문에 직업을 선택했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났으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휴식조차 다시 성과를 내기 위한 준비로 사용했다.
수현의 삶이 재미없어진 것은 특별한 사건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무엇이 유리한가?”를 먼저 물었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보다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며칠 동안 기억을 더듬은 끝에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회사 후배가 관계 문제로 힘들어했을 때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어 주었던 밤이었다. 수현은 후배가 반복해서 선택하는 관계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후배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이 이해된다고 했다. 그날 수현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충만했다. 매출 보고서를 완성했을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수현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을 좋아했다. 몸이 보내는 신호, 감추고 싶은 욕구, 관계에서 반복되는 반응을 함께 들여다볼 때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성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수현은 그 순간 가장 자신다웠다.
여섯 명이 모인 토요일 오후
수현은 지인 여섯 명을 초대했다. 재민과 민석은 부르지 않았다.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모임의 이름은 BNR Salon이라고 정했다. Body, Needs, Relationship. 몸과 욕구, 관계를 따로 떼어 판단하지 않고 하나의 삶 안에서 함께 살펴보는 작은 살롱이었다.
첫날 수현은 질문 카드 다섯 장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첫 번째 질문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무언가를 먹었던 최근의 순간은 언제였는가”였다.
지연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으로 돌아온 날마다 배달 앱을 열었다고 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자신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식이 도착하면 잠시 집 안에 사람의 목소리가 생겼고, 봉투를 정리하는 동안에는 하루가 끝났다는 감각이 들었다고 했다.
두 번째 질문은 “안전해지기 위해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결혼 12년 차인 혜진은 배우자의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배우자의 삶에서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확인하고 나면 잠시 안심했지만 다음에는 더 작은 변화까지 의심하게 됐다고 했다.
세 번째 질문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하는 모습은 무엇인가”였다.
늘 유쾌했던 준호가 사업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직원과 가족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매일 아침 사무실 문을 여는 일이 무서웠다고 했다. 모두가 준호에게 해결책을 기대했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네 번째 질문은 “누구의 인정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려운가”였다.
누군가는 부모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자녀라고 했다. 지연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보다 자신에게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사람을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칭찬을 원하는 모습보다 누군가의 실망을 피하려는 선택으로 더 자주 나타나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은 “아무도 박수치지 않아도 계속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였다.
이번에는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을 참는 방법은 오래 배웠지만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가족과 회사, 관계가 요구하는 역할은 능숙하게 수행했지만 자신이 어떤 감각을 좋아하고 어떤 관계에서 편안하며 어떤 일을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는 오래 묻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혜진은 혼자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가족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자신의 얼굴이 궁금하다고 했다. 준호는 매출과 상관없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지연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대신 한 번쯤 싫다는 말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대답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현은 그 작고 솔직한 욕구 안에서 자아실현의 시작을 봤다. 자아실현은 하루아침에 인생을 뒤엎는 결심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늘의 선택에 자신의 감각을 다시 포함하는 일이었다. 하기 싫은 일을 무조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왜 하고 있는지 알고 선택하는 것, 관계를 당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것, 더 큰 성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 일이었다.
다섯 욕구는 처음부터 하나의 이야기였다
모임이 끝난 뒤 수현은 혼자 테이블을 정리했다. 몇 시간 전까지 낯선 침묵으로 가득했던 자리에는 사람들의 고백이 남아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음식을 주문했던 밤,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닌데 배우자의 휴대전화를 확인했던 순간, 주변에 사람은 많은데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던 외로움, 성공할수록 더 초조해졌던 마음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됐다.
수현은 자신의 지난 시간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케이크가 당겼던 밤에는 음식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긴장한 몸을 풀어 줄 이완과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친밀함이 필요했다. 재민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확인했을 때는 사실만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안전이 필요했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했던 것은 모두를 사랑해서만은 아니었다. 관계 밖으로 밀려날까 두려웠다. 성공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렸던 것도 더 높은 곳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하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은 뒤 공허해진 것은 욕구가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그 모든 선택 안에 정작 자신의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욕구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몸의 허기는 관계의 허기로 이어졌고, 관계의 불안은 인정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었다. 인정을 얻은 뒤에는 자신의 선택이 없었다는 공허함이 드러났다. 수현이 겪은 것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이해되지 못한 하나의 욕구가 다른 욕구의 옷을 입고 반복된 과정이었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는 인간을 다섯 칸으로 나누는 평가표가 아니었다
1단계를 완벽하게 끝내야 2단계로 올라가는 단단한 계단도 아니었다. 인간은 여러 욕구를 동시에 느꼈고 상황에 따라 단계 사이를 계속 오갔다. 자아실현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도 몸이 아프면 생리적 욕구가 가장 중요해졌다. 안정적인 사람도 관계가 흔들리면 안전 욕구에 붙잡혔다. 성공한 사람도 소속되지 못하면 외로웠고, 사랑받는 사람도 자기 가치를 믿지 못하면 인정에 매달렸다.
생리적 욕구는 “내 몸에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안전 욕구는 “나는 무엇을 잃을까 두려운가?”를 보여 줬다. 소속 욕구는 “누구와 어떤 모습으로 연결되고 싶은가?”를 드러냈다. 존중 욕구는 “타인의 평가와 나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자아실현 욕구는 그 모든 질문을 지나 마지막 문장을 건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내가 BNR의 관점으로 욕구를 이야기하는 이유
나는 몸과 욕구, 관계를 서로 다른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은 욕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였고, 욕구는 관계 속에서 행동이 되었으며, 관계는 다시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몸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허기를 사랑으로 착각할 수 있었고, 욕구의 이름을 모르면 불안을 의심과 통제로 표현할 수 있었다.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만 바꾸면서 비슷한 상처를 반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BNR Salon은 욕구를 참는 법이나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 요령을 말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시작된 신호를 알아차리고, 그 아래에 숨은 욕구에 이름을 붙이며, 관계 안에서 더 건강한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함께 찾는 공간이었다.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욕구보다 더 위험한 것은 어떤 욕구가 자신을 움직이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배고픔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불안을 확인으로 달래며, 외로움을 인정으로 채우고, 성공을 자아실현이라고 믿는 동안 사람은 자기 삶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었다. 반대로 욕구의 이름을 알게 되면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반응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자아실현을 욕구가 모두 사라진 완벽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구를 모른 채 끌려다니던 사람이 욕구를 읽고 선택하기 시작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능력을 어떤 방향으로,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그날 밤 수현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남은 케이크가 있었다. 수현은 작은 조각을 잘라 접시에 담았다. 첫입은 달았고 두 번째 입도 맛있었다. 세 번째 입에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충분하다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휴대전화에는 재민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잘 지내?’
예전의 수현이라면 재민의 마음부터 해석했을 것이다.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다시 만나자는 뜻인지, 유나와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부터 살폈다. 재민을 여전히 그리워했지만 그리움이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명령은 아니었다.
수현은 천천히 답장을 썼다.
‘잘 지내려고 연습하고 있어.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수현은 다음 BNR Salon에서 나눌 질문도 적었다.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 중, 사실은 결핍이었던 것은 무엇인가.’
욕구 5단계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러나 수현의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밤에는 여전히 재민이 그리웠고, 불안한 날에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확인하고 싶었으며, 지친 날에는 냉장고 앞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달라진 것은 욕구가 올라오는 순간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지금 무엇이 당기는가’가 아니라 ‘지금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욕구의 끝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없었다. 대신 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욕구에 끌려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고, 자신의 욕구를 관계 안에서 말하며,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선택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욕구 5단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였다. 욕구는 인간의 약점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에서 멈췄고, 무엇을 잃을까 두려우며, 누구와 연결되고 싶고,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고 싶은지를 알려 주는 가장 정직한 신호였다.
몸을 이해하면 욕구의 문장이 들렸다. 욕구를 이해하면 관계의 반복이 보였다. 관계를 이해하면 비로소 자신의 삶을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
수현의 다섯 욕구에 관한 이야기는 끝났다. 그러나 BNR Salon에서 시작될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막 첫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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