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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욕구의 뇌|돈과 안정, 왜 가질수록 더 불안할까?

최고관리자 조회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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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은 없었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수현은 출근하자마자 조직개편 공지를 다시 읽었다. ‘효율성 강화’, ‘새로운 성장 기회’, ‘조직 경쟁력 확보’라는 표현이 반복됐다. 해고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수현의 눈에는 한 문장만 보였다.

‘당신의 자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수현의 머릿속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빠르게 완성됐다. 새 조직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고, 평가가 낮아지고, 결국 회사를 나오는 장면까지 이어졌다. 수현은 대출 상환일을 계산하고 보험을 해지했으며 부모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거짓말했다. 이 모든 장면은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현은 계좌를 열었다. 예금과 적금, 보험과 대출 잔액을 차례로 확인했다. 생활비를 계산하고 회사를 그만둘 경우 몇 달을 버틸 수 있는지 따져봤다. 숫자는 어제와 같았지만 오늘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집도 있었고 직장도 있었으며 비상금도 있었다. 그런데 안전하다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은 유나의 계정을 다시 열었다. 최근 게시물에는 어두운 바의 테이블과 와인잔 두 개가 찍혀 있었다. 화면 한쪽에는 남자의 손목이 보였다. 재민이 늘 차고 다니는 시계와 비슷했지만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이기도 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수현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수현은 대학 시절 첫 연인을 떠올렸다. 연락이 줄어든 이유를 바빠서라고 믿었지만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가장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수현은 관계의 작은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는 사람이 됐다.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려지기 전에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불안한 뇌는 빈칸을 최악의 이야기로 채웠다

인간의 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계속 예측했다. 이를 예측 처리(Predictive Processing)라고 했다. 재민의 시계인지 확실하지 않은 사진을 보았을 때 수현의 뇌는 현재의 빈칸을 과거의 배신으로 채웠다. 수현에게 늦은 답장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이전에 버려졌던 기억과 연결된 위험 신호였다.

위협을 빠르게 감지하는 편도체(Amygdala)는 사실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낯선 향, 뒤집힌 휴대전화, 늦어진 답장만으로도 먼저 경보를 울렸다. 상황을 분석하고 충동을 조절하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은 “아직 모른다”고 판단하려 했지만, 전날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수현에게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몸은 자율신경계(Autonomic Nervous System)를 통해 즉시 반응했다. 가슴이 뛰고 어깨가 굳었으며 입안이 말랐다. 스트레스 반응에 관여하는 코르티솔(Cortisol)은 몸을 긴장 상태로 유지했다. 수현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지만 몸은 당장 싸우거나 달아나야 하는 사람처럼 깨어났다. 문제는 맞서 싸울 대상도, 도망칠 장소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재민의 접속 상태를 확인했다. 회사 메일을 새로고침했고 계좌 잔액을 다시 봤다. 유나의 계정을 열었다가 닫았고, 재민에게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확인할 때마다 몇 초간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곧 더 큰 의심이 올라왔다.

심리학에서는 불안을 줄이기 위해 반복하는 확인이나 회피를 안전 행동(Safety Behavior)이라고 했다. 문이 잠겼는지 계속 확인하고, 상대의 마음을 반복해서 묻고, 건강 정보를 끊임없이 검색하는 행동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었다. 당장은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장기적으로는 ‘확인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믿음을 강화했다.

수현은 안전해지기 위해 확인했다. 그러나 확인할수록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더 견디지 못했다. 계좌를 확인하면 앞으로의 비용이 떠올랐고, 회사 메일을 열면 다음 인사 공지가 걱정됐다. 재민의 접속 상태를 보면 누구와 대화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수현은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지 않을 가능성을 계속 수집하고 있었다.

민석의 제안과 재민의 침묵

점심 무렵 민석에게 전화가 왔다. 조직개편 소식을 들었다며 다른 회사의 마케팅 총괄 자리를 제안했다. 지금보다 높은 연봉과 큰 직책, 독립된 팀이 보장된 자리였다.

“수현 씨 정도면 더 좋은 조건을 선택할 수 있어요.”

민석의 말은 기회처럼 들렸고 동시에 구명줄처럼 느껴졌다. 재민이 불안해지자 자신을 확신해 주는 민석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회사가 흔들리자 높은 연봉과 직책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수현은 안전을 원했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견디지 못해 새로운 안전장치로 뛰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재민이 찾아왔다. 수현은 더 미룰 수 없었다.

“유나가 누구야?”

재민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한숨부터 쉬었다. 유나는 같은 프로젝트를 맡은 동료였고, 전날 술을 많이 마셔 집까지 데려다준 것뿐이라고 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말하면 수현이가 이렇게 의심할 것 같았으니까.”

그 한 문장은 수현을 이상하게 조용하게 만들었다. 유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자신의 불안이 귀찮은 감정으로 취급됐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해명이 아니야. 내가 불안할 때 당신이 도망가지 않는다는 느낌이야.”

재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현은 그 침묵 속에서 관계의 균열을 봤다. 재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자신을 감당해 줄 것이라는 믿음도 없었다.

재민이 돌아간 뒤 수현은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직 조건을 묻기 위한 전화였지만 대화는 어느 순간 관계 이야기로 넘어갔다. 민석은 재민을 비난하지 않았다. 수현에게 당장 헤어지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를 물었다.

“수현 씨가 정말 두려운 건 재민 씨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이에요?”

수현은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제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무서운 것 같아요.”

민석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은 재민의 침묵과 달랐다. 대답을 피하는 침묵이 아니라 수현이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수현은 자신이 직장을 잃는 것보다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두렵고, 재민을 잃는 것보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기 전 민석이 물었다.

“수현 씨는 불안한 자신을 누구에게 끝까지 보여 준 적이 있어요?”

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락처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있었지만 지금 전화할 사람은 없었다. 안전해 보이기 위해 언제나 괜찮은 사람을 연기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수현이 함께 버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안전은 더 많이 가진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안전 욕구가 더 많이 가지면 해결되는 욕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돈이 생기면 잃을 돈이 생겼고, 사랑이 생기면 잃을 사람이 생겼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떨어질 자리가 생겼다. 모든 위험을 없애는 방식으로는 안전해질 수 없었다.

안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를 완전히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에 가까웠다. 불안할 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관계, 위험을 상상과 사실로 구분할 수 있는 힘, 잘못된 선택을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경험이 필요했다. 안전은 잠긴 문과 통장의 숫자 안에만 있지 않았다. 무너진 모습을 보여도 떠나지 않는 관계와 자신의 감정을 감당할 수 있다는 내적 믿음에도 있었다.

두 사람은 안전해지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현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을 열자 재민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수현과 민석이 주고받은 이직 자료가 들려 있었다.

“민석이랑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웠어?”

수현은 재민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다. 버려질까 두려워 차갑게 굳은 표정이었다. 수현은 재민을 확인했고, 재민은 수현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안전해지기 위해 서로를 감시했고, 그 감시 때문에 서로에게 가장 불안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현은 그날 알게 됐다. 안전 욕구 다음에 인간이 찾는 것은 더 높은 벽이 아니었다. 그 벽 안으로 들일 사람이었다. 하지만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에게 진실하게 속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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